시와 함께하는 세상-우리가 수평을 이룰수 있을까
시와 함께하는 세상-우리가 수평을 이룰수 있을까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7.05 16:0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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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우리가 수평을 이룰수 있을까

어제의 너와 오늘의 내가 달라서
우리는 매일 어느 한쪽이 기운다

속도를 잃은 바퀴처럼
왜곡된 사랑이 잠잠해질 것이라고 믿는 시소 위

네가 뜬구름을 잡으려 할 때마다
나는 바닥에 방점을 찍었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놀이
일생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
우리는 마주 보고 있다
서로의 손 대신 시소의 손잡이를 잡고

점점 커져가는 기울기
비대해진 우울을 덜어내고
농담을 건넬 수 있는 거리만큼 가까워지면
우리가 수평을 이룰 수 있을까
 
다가갈수록 흔들리는 중심
나의 비관과 너의 낙관이 나란해졌다면
그것은 평화가 아닐 것
평화라고 말하고 싶은 권태일 것
 
(조영란의 ‘조율’)

조영란의 ‘조율’을 읽어보노라면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생각난다. 인간관계의 근원적인 나와 너의 관계에서 ‘나’라는 말은 독립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아니고 본래 ‘너’라는 단어가 있다는 조건에서 인간관계의 구분을 위해 쓰는 말이라는 것이 부버의 논리다. 나와 너의 진정한 만남이 형성되어 가기 위해서는 서로가 일정한 관계를 통해 일정한 연관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연관성이란 인간의 감정을 묶을 수 있는 형태인데, 그것을 ‘친숙도’라 한다.

시인은 나와 너의 관계를 좀 더 압축하고 있는데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아닌 나와 나의 관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제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르므로 ‘너’가 되는 것이고 오늘의 나는 진정한 ‘나’라는 논리다. 그렇게 보는 이유는 어제라는 환경과 오늘이라는 환경이 달라서 주체적으로 나는 이미 성숙을 통해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적인 흐름에 따라 가치관도 변해버렸기 때문에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될 수 없다는 논리다.

그것은 현재의 나는 미래의 나와도 달라질 수 있다는 복선도 갈려 있는 셈이다. 그래서 어제 옳다고 여겼던 것이 오늘은 부끄러움이 될 수 있고 어제의 진리였던 것이 오늘은 진리가 될 수 없는 경우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새로운 가치의 판단은 마치 무게에 따라 기울기가 달라지는 시소와 같아서 옳다는 진리는 영구불변일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요즘 하는 말로 세대 차이나 꼰대의 시각에 비교한다고나 할까…, 그렇게 이쪽 저쪽으로 기울기도 한다는 것이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놀이 / 일생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처럼 인간의 시간이라는 것은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지만, 옳고 그름의 이념이나 관념도 쉽게 끝날 수 없다는 논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은 그 불안 속에서도 서로 시소의 높낮이처럼 경쟁하면서 서로의 기울기가 높아지길 기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시인은 현실 앞에 서로 기울기를 포기하고 수평을 이룰 수 있다면 그리하여 모든 우울함을 털어내고 너와 내가 서로 가까이서 농담을 건네면서 지낼 수 있으면 하는 바람(세대 차이의 해소라고나 할까)을 여운처럼 남기고 있다. 이것은 현재 관점에서 본 나(시인)가 소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어제)에서 현재(오늘)로 흐르는 동안 가치관도 다소 변화해야 하는데, 나(현재)의 비관과 너(과거)의 낙관이 나란해진다면 변화가 없거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은 현재인 내가 쉽게 권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시인이 굳이 과거와 현재의 나를 다르게 본 것은 과거의 잘잘못을 떠나 보다 발전적인 현실이나 미래를 추구하자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시제가 ‘조율’이라고 한 것은 당연히 오늘은 모든 면에서 어제보다 분명히 발전적인 변화를 해야 하고, 적응해야 한다는 논리가 되기 때문에 그 적응의 과정(발전적 의미)을 시인은 ‘조율’이라 이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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