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생명이 되기 이전의 것들
시와 함께하는 세상-생명이 되기 이전의 것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7.12 16:26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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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생명이 되기 이전의 것들

사막을 옮기는 바람을 보았다
자고 나면 사막의 등뼈가 휘어 있었다

사막 긴 등뼈의 굴곡이 움직인다
수족이 없는 사막이 어떻게 이동하는지 알 것 같았다
생명의 알집 하나만 오염되어도 전체가 고비인 내 몸과 다르게
고비사막은
바람 외 어떤 생명도 키우지 않는다
생명이 가장 위험한 고비라는 것을 깨우친 후일 것이다

생명은 위험하고 성가시고 손이 많이 가는 성질을 가졌다

사막의 유일한 성분은 모래뿐
고비사막은 그것조차도 성가셔서 바람을 부려
먼지의 먹이로 줘버린다

나는 이곳에서
그렇게나 궁금했던 내 후생의 거처를 확인한다
고비사막이 자신의 영토에서 모든 생명을 제거한 후
생명 이전의 것들만 배치한 덕분이다

생명이 되기 이전의 것들
생명이 될 필요가 없었던 것들
생명에서 급히 빠져나온 흔적도 없었다

생명은 중심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허비하는데
내가 확인한 고비사막은 자신에게 중심을 두지 않았고
아주 작은 중심이 생기는 순간
바람이 와서 금세 지워버렸다

(김대호의 ‘고비의 배후’)

이번 시는 참으로 시인의 시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에서는 사막과 바람이 주체와 객체로 등장하는데, 둘의 호응이 너무 잘되어 있으며, 무생물인 두 개체에 생명을 불어넣어 바람과 사막을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처럼 만들어 버리고 있다.

바람이 사막의 등뼈를 휘어 놓았다는 것, 그리고 뼈가 움직였다는 것은 그 뼈를 가진 사막도 생명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고비사막과 바람은 서로 공생관계임을 알 수 있으며, /생명은 위험하고 성가시고 손이 많이 가는 성질을 가졌다/ 처럼 생명을 거느린다는 것은 정말 힘이 드는 일이지만, 사막은 바람만은 아무리 힘들어도 거느리고 있는데, 바람과 사막은 공생관계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막은 아무 생명도 살 수 없는 삭막한 곳인 듯하지만, 나름대로 많은 생명이 살고 있다. 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오로지 사막과 바람만 보인다. 이러한 거시적 시각은 당연히 생명의 근원적인 의미에서 말하는 생명일 것이다. 그러니 다른 생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다.

생명의 시작은 당연히 무에서 유의 과정으로 진화하는 법이다. 아무것도 없는 존재(바람)와 무엇인가 존재(사막)하는 중간에서 생명 탄생의 비밀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거기에서 시인은 / 나는 이곳에서 /그렇게나 궁금했던 내 후생의 거처를 확인한다 /라고 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다. 성경에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라고 했듯, 내 후생은 당연히 여기 먼지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또한 이 먼지의 세계가 생명이 빠져나옴과 생명이 완성되는 중간 지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생명이 탄생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언제나 그 중간 지점은 일정하게 머물러 있지 않다. 그것은 생명 탄생이 되는 지점은 비밀스러운 곳이면서 바람에 의해 사막은 끊임없이 움직이게 되고 그렇게 움직여야 생명 탄생의 비밀스러움을 지켜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막에 있어 바람이란,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존재이면서 사막 본연의 성품을 지켜주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아주 작은 중심이 생기는 순간 /바람이 와서 금세 지워버렸다 /면서 바람은 사막의 배후에서 사막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렇듯 일반적인 사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자연적인 상황을 시인의 눈에는 그냥 자연적인 상황이 아닌 인과관계로 보려고 한 것이다. 이렇듯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능력은 오직 시인만이 할 수 있으며, 또한 시만이 가지는 특권이 아닐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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