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너, 집에 가
시와 함께하는 세상-너, 집에 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7.26 16:10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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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너, 집에 가

훔친 구두를 신고
훔친 가방을 메고
소풍을 갔다

발등에 족쇄 같은 고리가 달린
여자아이의 구두를 신고
어수선한 닭집 옆
주렁주렁 매달린
시장바구니 하나를 훔쳐
소풍을 갔다

풀밭 위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었다
선생님은 구두를 먹고
아이들은 내 찢어진 반바지와 바구니를
김밥처럼 먹으며

내게 말했다
구두에게 말했다
바구니에게 말했다

너, 집에 가

(박상순의 ‘빵 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6년 뒤’)

제목이 매우 긴 시로, 언 듯 읽으면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시이다. 그러나 시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요즘 식으로 말하면 웃픈 내용이다. 즉 웃으면서도 약간 슬픈 이야기라는 이야기다.

훔친 가방이나 시장바구니로 소풍을 갔다고 하는데, 그리고 친구들과 도시락을 먹는다는 것으로 보아 시에 등장하는 나의 신분은 학생으로 볼 수 있다. 예전에는 학교 가방이 아닌 소풍 가방이 따로 있어서 그 속에 도시락을 비롯한 갖가지 과자나 음료수들을 넣어 들고 다녔다. 그런데 시적 내용으로 볼 때, 나는 집안이 가난하여 가방이나 가방 속의 내용물을 살만한 형편이 못되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즐거운 소풍을 가지 않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부득이 소풍 용품은 모두 훔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발등에 족쇄 같은 고리가 달린 / 여자아이의 구두를 신고/의 내용으로 보면 아주 고급스러운 여성용 구두를 신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여자가 아니라 남자다. 남자가 여자 구두를 신었는데, 이유가 뒤따라 나온다. 어수선한 닭집 옆에서 어수선하게 매달린 시장바구니와 함께 급히 훔쳐 온다고 온 것이 여자 구두였던 것이고 그것 때문에 여자 구두를 신고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맛있는 도시락을 먹고 여성용 구두를 신었다는 사실과 유행하는 찢어진 반바지 차림의 나를 보고 친구들은 수군거렸을 것이다. /김밥처럼 먹으며/란 표현은 진짜 김밥을 먹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러한 상황을 두고 입방아를 찍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급기야 선생님까지 의아해하면서, 구두가 어쩌니저쩌니 반바지나 바구니 속의 내용물을 가지고 어쩌니저쩌니하다가 마침내 구두와 바구니의 출처를 알게 되면서 화가 난 선생님이 “너 집에 가”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말속에 심한 노여움이 담긴 것은 물론이다. /구두에게 말했다 / 바구니에게 말했다/라는 표현은 구두나 바구니의 출처를 물으며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라는 의미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즐거운 소풍날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지는 순간이다.

이 시는 중년의 나이를 가지고 있는 박상순 시인의 작품인데, 시의 내용으로 보면 앞서 언급했듯 매우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내용이다. 시인의 성장기 시절의 자서전인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 시절에 있었던 옛 친구의 사정을 생각하고 쓴 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개발 시대에 충분히 있을 법한 에피소드다. 지금이야 이러한 상황을 두고 절도죄로 고소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렇게 꾸중하지만 ‘너, 집에 가’라면서 꾸중의 이면에 교화(敎化)가 있어서 어려웠던 그 시절을 회상할 수 있다.

정황으로 보면, 시제가 ‘빵 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6년 뒤’라고 하여 사건이 발생한 지 수년이 지난 상황의 회상 형식이다. 분위기가 위트가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어려웠던 시절의 아픔이 많이 묻어 있는 작품이다. 동시대에 성장기를 함께 겪었던 필자가 생각해 볼 때, 충분히 마음이 동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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