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완성이 되어 있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완성이 되어 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8.02 16:20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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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완성이 되어 있다

쨍그랑!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그릇은 깨어져 버렸다

박물관에 모셔둔 상감청자
또는 하잘것없는 국밥집 뚝배기

어쨌거나 그것은
아차 하는 순간에 박살이 나버렸다

다시는 복원할 수 없는
그것은 그러나
그때 비로소 완성된다

깨어지고 나서야 없음으로 돌아가
제기랄 편히 쉬고 있는 것

이제야 그것은 보이지 않게
완성되어 있다

(이형기의 ‘완성’)

우리 지역의 출신인 이형기 시인은 17세에 시단에 들어선 후 이듬해에 당대 최고의 시인이라 할 수 있는 서정주, 모윤숙 시인의 추천으로 정식으로 문단에 입문하게 되니, 우리나라에서 최연소등단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는 초기 시에 비해서 중 후기부터는 다소 난해하고 아포리즘적인 경향으로 흘러가게 되는데 이번에 소개되는 ‘완성’ 역시 이러한 부류의 시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릇이 깨져버렸단다. 그의 말을 빌려보자면 /박물관에 모셔둔 상감청자/ 또는 하잘것없는 국밥집 뚝배기/라고 하고 있으니 실제 그릇이라기보다는 임의 그릇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상감청자든 뚝배기든 가격의 경중을 초월하여 그릇이란 부딪히면 무조건 깨진다는 논리니, 종국에는 귀천이 중요하지 않고 언젠가는 깨질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한번 깨진 그릇은 절대로 복원할 수 없단다. 당연한 말이다. 동물로 생각하면 한번 죽은 생명은 다시 살아날 수 없음과 같은 이치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두고 종말이 아닌 /그때 비로소 완성된다/라는 매우 역설적인 논리를 펴고 있다. 깨졌다는 것은 더 이상 그릇으로서의 가치가 없기 때문에 다시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한데,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상반된 논리인가.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범인(凡人)들의 생각이다. 위대한 시인은 그렇게 얕은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상감청자든 뚝배기든 그 근원은 어디서 왔는가, 당연히 흙이라고 할 수 있는 자연에서 왔지 않은가. 그러면 깨지고 못 쓰게 되는 순간 이들은 다시 인간의 손에서 떠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니 원래 자연에서 왔으니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연 그대로의 완성이 아니겠는가. 시인은 이렇게 큰 시각으로 완성의 의미를 보고 있어야 한다.

이를 두고 불교에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논리로 설명한다. 그릇이라고 하는 실체(색)는 언젠가는 깨진다는(공) 것이기 때문에 색과 공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보면 함께 존재하는 것이라는 논리다. 그것은 흡사 시지프스 신화에서 절벽 위에서 굴러오는 바위가 사건의 시작이냐, 아니면 바위를 그곳에 올려둠으로써 바위가 굴러 떨어지게 한 것이 사건의 시작이냐 하는 것과 같은 논리다. 하지만 이 역시 큰 틀에서 볼 때, 시작과 끝의 구분이 모호하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생각을 공사상(空思想)이라고 하는데 근본적으로 시작과 끝은 함께 존재하는 것이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논리다. 이형기 시인은 바로 이러한 논리로 ‘완성’이라는 개념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비교적 짧은 시이기는 하지만, 담긴 사상이 깊은 이른바, 지극히 아포리즘(aphorism)적인 시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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