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게하는 세상-울지 않아요
시와 함게하는 세상-울지 않아요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8.23 16:08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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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울지 않아요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 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을 잡으려고 손을 내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좇아 신발을 묶지도
오렌지 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무럭 늙느라

케이크 위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갈지도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하며 나를 찌르죠
그러면 흐르는 내 생리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 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박연준의 ‘얼음을 주세요’)

참으로 안타깝고도 슬픈 이야기다. 최근 우리 사회는 너무나 광폭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남자와 잤다는 이야기인데 /여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의 내용으로 보아 원치 않는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왜인가? 상대방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지만,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뿌리며/가 주는 뉘앙스로 보면 소녀(우유)에서 막 처녀(커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허무하게 순결을 잃었음에 대한 상실감에서 오는 것이리라.

그 후유증으로 초승달을 잡으려고도 꿈을 좇으려고도 하지 않으며 젊음을 만끽하려고도 하지 않고 점차 애 늙은이가 되어 간단다. 그러니까 꿈과 이상 실현에 대한 의지보다는 현실적인 아픈 경험을 메타포화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건조화된 나는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들어 갈지도/ 라면서 극단적인 생각까지도 한 것으로 짐작된다. /늙은 봄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라고 하여 사는 것이 무미건조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는데 이런 현상은 상실감에서 오는 허탈함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슴 아픈 내용은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하며 나를 찌르죠/라면서 후유증이 트라우마가 되어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새벽길 그 험한 시간대에 낯선 남자를 만나도 자포자기하는 내가 되기도 한다는 논리도 추가하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는 많이 거칠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유 없는 폭력과 난폭해진 사회현상 그리고 작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상대방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이기주의적인 상황이 만연해지면서 사회 곳곳에서 위협이 도사리고 있다. 이번 시에서는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고발 시로 볼 수 있다. 물론 시는 개인의 내용은 경험담일 수도 있겠지만, 가상적 사회 현실을 만들어 시대의 실상을 고발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으므로 전적으로 시인의 경험담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시의 제목이 ‘얼음을 주세요’이다. 독자분 중에는 제목과 시 내용이 매치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얼음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 사람의 마음이 답답해지면 해갈을 위해 얼음물을 찾지 않는가. 그러니까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기 위해 얼음은 꼭 필요한 법이다. 한편, 얼음은 빙하로 그 속에 갇히게 되면 모든 것이 정지된다. 그러니까, 나의 이 비극이 현실이 아닌 꿈이었으면 좋겠고, 가능하다면 빙하에 갇혀 더 이상의 상실감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빌러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참고로 박연준 시인은 여류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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