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본래 어머니의 몸으로
시와 함께하는 세상-본래 어머니의 몸으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8.30 14:3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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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본래 어머니의 몸으로

다시 사는 환희에 들떠
넘쳐나는 개선가

여기는, 먼 먼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눈먼 몇십 대의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하여, 아직까지도 우리의 감격을 풀지 못하는 나약한 “꽃밭

여기는 또 조용한 갈림길, 우리는 깨끗이 직각으로 꺾여져 가자, 다시 돌아볼 비굴한 미련은 팽개쳐버리자.

갑자기 너는 무엇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가? 우리 오래 부끄러워 눈길을 피하면, 영원한 향수가 젖어있는 어머니의 젖가슴, 너는 다시 우리를 낳아 준 본래 어머니의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허면, 우리는 고운 매듭을 이어주는 숨소리를 음미할 때마다, 살아있는 보람이 물결이 일어 넘쳐나는 개선가를 불러준다.
여기는 먼 먼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생명의 온기를 감사하는 서정의 꽃밭.

(마종기의 ‘해부학 교실’)

이번 시는 박두진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하신 마종기 선생님의 등단작을 소개해 볼까 한다. 마종기 선생님은 의사이면서 시인으로서 미국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분인데, 등단 시 역시 의학과 관련된 작품이다.

‘인류는 오래 사는 병에 걸렸다’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사람이 오래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희생 중 하나가 커대버(cadaver)라는 것이 선생님의 생각이다. 즉, 인류는 커대버를 통해 신체 구조나 발병의 원인을 밝혀 인류가 장수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논리다.

그래서 /다시 사는 환희에 들떠/라고 운을 떼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어서 인간은 오랜 역사를 유지하면서 많은 문명을 이룩했다고는 하지만, 탄생의 신비를 밝히지 못한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세 번째 연부터는 인류가 커대버 덕분에 오래 살게 되었지만, 정작 커대버는 죽은 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커대버 개개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죽은 상태에서 산자(인류)를 위해 온전히 죽지도 못하는 상황이 된 점을 두고 미안하게 생각하는 내용이 이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사자(커대버)를 위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시인은 커대버가 비록 사자이지만, 당연히 보통 사람처럼 죽기 전의 삶에 대한 미련이 많았을 것이라는 전제하에 죽은 자에게 위로하는 말을 하게 되는 부분이 네 번째 이야기다. 그래서 산자들은 사자(死者)로부터 받은 혜택을 받았지만, 상대적으로 사자의 개인적인 슬픔은 제대로 달랠 수 없는 미안함이 있다. 다만, /너는 무엇이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는가?/ 본래 어머니의 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당연히 본래의 어머니는 흙, 그러니까 대지가 되니 어차피 사람은 한번은 죽는다는 논리를 통해 어설프게 커대버를 위로하는 내용이다.

다섯 번째 연에서 ‘허면’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뜬금없다 싶지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말이다. ‘허면’이라는 말은 ‘각설하고’라는 말처럼 다음 상황의 이야기로 넘어간다는 의미다. 바꿔 말하면, 지금까지 너(커대버)를 다독거려 주었고 그로써 네가 진정되었다면, 다시 /살아있는 보람이 물결이 일어 넘쳐나는 개선가를 불러준다./는 말처럼 덕분에 산자가 건강하고 오래 살게 된 점에 대한 기쁨과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삶을 누리겠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허면’은 죽은 자의 이야기에서 산자의 이야기로 돌아오는 부분이라는 의미다.

어떻게 보면 마종기 선생의 시는 스승인 박두진 선생의 사조와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인다. 박두진 선생은 주지하다시피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짙은 자연주의적인 색채로 흐르고 있다. 이번 작품은 미미하지만 다소 모더니즘적인 색채를 깔고 있는 듯하다. 마종기 선생님은 1959년에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게 되는데, 이 시점이 리리시즘에서 모더니즘으로 변해가던 과도기인 점을 고려해 보면 스승과 제자 사이의 시적 사조에 약간의 차이점이 보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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