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언제까지나 나는 입구였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언제까지나 나는 입구였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9.06 16:0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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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언제까지나 나는 입구였다,
 
나는 입구였다, 줄지어 내게로 달려 들어온 것들이 뒤엉킨 자리에서 봉투처럼 밀봉되어
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몰랐다
 
낯선 손과 악수하며 네 번째 온 사람, 여섯 번째의 노인이나
아흔두 번째의 양으로
다시 나를 반죽해놓고
백지 위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안개 속으로,
짐승의 소리를 듣고 술렁이는
숲속으로, 너의 그림자 속으로,
이 모든 것을 집어넣을 수 있는
불 속으로,
 
아침을 사전에서 지우고 호주머니가 깊어졌네
내 앞에 놓인 백지가 넓어지고, 비틀거리면서
밤이 왔네
좁고 어두운 창문은 나의 몇 번째 밤인지
모든 계절이 추웠네
 
나를 향해 돌진하는 눈빛으로
찢어진 페이지,
두 발을 잃고 넘어지는 고독한 나의 페이지,
 
언제까지나 나는 입구였다, 백지 위에서
숲이 검게 우거지고 있었다
 
(김지녀의 ‘검은 재로 쓴 첫 줄’)
 
‘검은 재로 쓴 첫 줄’은 김지녀의 시집 ‘양들의 사회학’에 소개된 작품이다. 시집 제목에 양과 사회가 등장하는 것에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문자 그대로 양은 순한 동물의 상징이고 보면 양들의 사회학이란, 순종적인 사회 구조론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할 수 있다. 시집 제목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번 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같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나는 입구였다’는 말이 주는 어감에서 모든 사건의 원인은 나에게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낯선 사람을 만난다든지 노인을 만난다든지 등의 수많은 만남에서 나를 반죽해야 하고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논리는 당연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감정 조절을 해야 한다는 말이 될 것이다. 짐승의 소리, 그림자 속, 불 속 등의 이야기는 사람을 만나는 과정에서의 많은 어려움을 메타포(metaphor)로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침이 없음, 호주머니가 깊어짐, 백지가 넓어짐, 비틀거림 등은 매일 일찍부터 시작되는 일과의 시작과 함께 정리해야 할 서류가 끝이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리라. 그러므로 무미건조한 날이 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사시사철 사무적인 인간관계로 형성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도 고객들의 항의(돌진하는 눈빛)로 자주 나의 서류는 수정(찢어진 페이지)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날마다 모든 일의 출발점이 되는 현장에서 사무적인 인간관계만 형성되어 /숲이 검게 우거지고 있었다 /처럼 감성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당장이라도 박차고 뛰쳐나오고 싶지만,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미 순한 양이 되어 버린 직장생활에 적응되어 불평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현대인의 풍속도를 대변해주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시집 ‘양들의 사회학’에 소개되는 대다수의 시가 사회적 모순에 대해서 변화를 추구하는 행동보다는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매사 제도권에 순응되고 흡수되어가는 우리가 뒤돌아보는 내용이다. ‘검은 재로 쓴 첫 줄’이라는 시제에서 보듯, 재로 쓴 첫 줄이라는 것은 사람의 요구에 따라 쉽게 수정해 버리듯 쉽게 현실에 안주해 버리는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닐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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