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산 꿩도 섧게 울은
시와 함께하는 세상-산 꿩도 섧게 울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9.20 15:05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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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산 꿩도 섧게 울은

여승(女僧)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느 산(山)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 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 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 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백석의 ‘여승(女僧)’)

백석 시인의 시를 다시 읽어본다는 것이 이 시대의 독자들에게 얼마만큼의 감흥을 줄지는 모르겠지만, 시적인 상황을 인식하게 된다면 분명 큰 울림이 될 것 같다. 특히 이번 시에는 가지취니 금점판이니 섶벌이니 마당귀 머리오리 등과 같은 우리나라의 지역 토속어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관심 있는 이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산사에 여승이 있었는데, 취나물 향이 배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면서 예전에 비해 많이 늙어 보였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시인과 여승은 구면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젊은 아낙이 여승이 된 사연을 생각해 보니 서러워졌다고 한다. 서러움을 무거운 불경에 비유하고 있는데, 여승의 사연에 비해 심오한 불경이 가볍다는 것은 그만큼 서러움에 대한 무게가 크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첫째 연의 내용과는 달리 두 번째 연의 이야기는 뜬금없이 오래전 칭얼거리는 딸을 때리며 평안도 어느 금광 부근에서 광부를 상대로 옥수수를 파는 가난한 여인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 여인의 남편은 벌이 꿀을 따기 위해 떠나듯 가족의 생계를 위해 돈을 벌고자 집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린 딸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형편이다. 그런데 마지막 연에서는 그 딸마저 죽어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이 여인에게 살아갈 희망은 완전히 사라진 셈이 된다.

도라지의 꽃말은 영원한 사랑과 존경이라는 말도 있지만,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에서는 짝사랑이나 잃어버린 희망과 함께 안타까움을 뜻하기도 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도라지꽃의 의미는 후자에 해당되겠는데 참고로 백석은 영어 교사였다. 그리고 ‘머리오리’는 머리카락의 올이라는 의미의 사투리로 여기서는 사찰 한 모퉁이에서 여인의 머리카락이 떨어진다는 것이니 이날이 여승이 출가하는 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연에서 구면인 여승을 등장시켰다가 다시 두 번째 연부터 옥수수를 파는 여인을 등장시킨 것은 두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속세에서 이미 살아갈 희망을 잃어버린 여인이 불가에 귀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보면 그녀가 불가에 귀의한 것은 선택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상황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백석 시인은 평안도 정주 사람으로 일제 강점기 시절에 쓴 이번 시는 당시 한 가정이 어떤 식으로 파탄 나는지에 대한 시대적 아픔을 바로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자면, 당연히 이면에는 한 가정이 파탄 나는 단면을 통해 우리 민족의 수난사를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닌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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