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1인칭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1인칭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0.04 16:23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1인칭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서랍은 늘 조금씩 열려 있습니다.
들키기 쉽게
아니, 들킬 수 있도록.

누구도 자신의 서랍은 볼 수 없습니다.
스스로에게만 사각지대거든요.

서랍에는 1인칭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사소하고 하찮은 담론부터
거대하고 자의적인 농담까지
어쨌거나 내 것일 수밖에 없는 이력들.

등 뒤에서 누군가 내 서랍을 읽고 있습니다.
아마 제법 오래 관찰 중이었던 것 같은데요.
내 서랍이 그 정도로 크고 깊은 걸까요.

서랍에 대해서는 지극히 제한된 표현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 펜과 붓을 들고 있고요.

서랍은 고의적으로 들통납니다.
내 서랍은 순식간에 그림으로 증명되겠지요.
서랍을 열자마자 날아오르는 파랑새라니요,
그래서 등 뒤가 그토록 가려웠던 걸까요.

이번엔 내 방식으로 누군가의 서랍을 열겠습니다.
조금 넓어진 입구로 한껏 풍경을 읽은 후,
옮겨 적어 볼까 합니다. 이를테면, 詩랄까요.

(이은림의 ‘크고 깊은 서랍’)

일반적으로 누군가의 책상에 함부로 앉을 수도 없겠지만, 더구나 그 책상 서랍을 열어본다는 것은 사생활 침해에 해당하기 때문에 대단한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시인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일부러 조금씩 열어둔다고 한다. 보편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없다.

/서랍에는 1인칭의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일인칭이란 시인 스스로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두 /어쨌거나 내 것일 수밖에 없는 이력들./이라고 했듯이 나의 개인사이기 때문에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어느 정도 방지 장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의 서랍을 몰래 보고 있다면서 시인은 /내 서랍이 그 정도로 크고 깊은 걸까요./라면서 오히려 그 타인이 시인의 서랍을 통해 생활의 전범(典範)으로 삼으려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로 말하고 있다.

이 경우라면 서랍이 열려 있을 이유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으며, 오히려 자긍심이 생기는 순간이다. 서랍은 프라이버시(privacy)를 넘어서는 의식이다. 시인의 서랍을 열면 그림이 나오고, 파랑새가 날아오르기도 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펜이나 붓에 의해서 표현된 것들이란다. 그렇다면 독자 여러분들은 시인의 서랍은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책상 서랍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림이 나오고 붓에 의해서 파랑새가 날아오른다는 것은 작가의 창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연히 시인의 창작은 /조금 넓어진 입구로 한껏 풍경을 읽은 후, 옮겨 적어 볼까 합니다. 이를테면, 詩랄까요./라고 했듯이 이렇게 되면 첫 번째 연에서 서랍을 열어두는 이유가 충분히 소명되었을 것이다. 즉, 창작(創作)하는 장소로서의 책상이요 서랍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서랍을 열어둔다는 것은 시인이 자신의 시를 통해 독자들과 대화(교감)를 나누는 형식을 말하는 것이 된다. 물론 시인도 /이번엔 내 방식으로 누군가의 서랍을 열겠습니다./라고 하여 독자의 입장으로 돌아가 다른 작가와도 대화를 나누어 보겠다는 의지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시는 시인의 <밤이라 불러서 미안해>라는 시집에서의 제일 첫 번째로 소개된 작품이다.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오직 ‘크고 깊은 서랍’ 한 편만 수록되어 있다. 특이한데 그것은 이 시가 시집에서의 사상적 맥락이 집약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글 쓰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