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숲의 주술을 베껴 쓰느라
시와 함께하는 세상-숲의 주술을 베껴 쓰느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1.22 16:1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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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숲의 주술을 베껴 쓰느라

어디서도 끝나지 않는 환생이 산다

몸을 갈아입지 못한 이무기들의 한숨과
이름을 묶어 둔 눈빛이 떠다니는 곳

발 없는 이들을 조상으로 두어서
걸음 없는 비가
환절기마다 쏟아지고
허공에 뿌리를 뻗어가는 곳

텃새들이 계절풍을 불러들이면
영혼을 가질 수 없는 주술사가
재앙조차 낭만으로 바꾸는 곳

물푸레 숲이 저녁의 방언을 쏟아내면
시인은 타이핑을 멈추지 않는다

숲의 주술을 베껴 쓰느라
손목이 시큰할 때까지

(도복희의 ‘물푸레나무 숲에서’)

이 시를 읽는 순간 어떤 영적인 힘을 느끼면서 정신을 맑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나도 이런 시를 한번 써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시의 출발이 고대 샤먼의 주술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면 주술과 시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많다. 샤먼이 접신(接神) 하여 공수(拱手)를 통해 해원(解冤)을 할 때, 보통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데 이런 주술사의 말을 ‘방언(方言)’이라 한다. 그래서 신은 시인에게도 접신을 허락했는데,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시인이 시를 쓰게 된다고 볼 때, 그 시상 속의 메타포는 바로 샤먼의 공수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끝나지 않는 환생이란, 쉼 없이 탄생하는 숲속의 생명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고 몸을 갈아입지 못한 이무기란 변함없이 땅에 박혀 울창하게 자라는 ‘물푸레나무’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곳 숲에서는 단순히 이국적이라는 생각을 넘어 신비주의적인 의식이 깔려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인적이 드문 곳에서 수많은 영적인 생명이(나무) 탄생하고 빽빽하게 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발 없는 이들을 조상으로 두어서 /걸음 없는 비가 /환절기마다 쏟아지고 /허공에 뿌리를 뻗어가는 곳”이란 물이 증발하고 다시 비가 되어 내리는 순환론적인 상황을 말하여 생명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죽어가는 연속을 의미하는데 이런 상황을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연관시켜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허공의 뿌리는 허공으로 향하는 나뭇가지를 가리킨다는 의미다. 이곳에는 철새가 아닌 텃새가 오히려 환경 변화를 이끌어가는 곳이라 생각하면서 주체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래서 새를 숲속에 있는 영혼의 주술사라 여기면서 아름다운 소리로 인적 없는 곳을(재앙) 헤매는 사람들에게 위안(낭만)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텃새의 울음소리는 곧 주술사의 방언(方言)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시인은 그 주술사의 주술(방언)을 시로 번역한다고 하니 시인의 시는 곧 자연의 복음을 전달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번 시는 생활에 찌든 현대인들의, 감성의 순화를 권유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방법론에서 일차적으로 “숲의 주술을 베껴 쓴”다고 한 것이다. 시의 출처는 도복희 시인의 “몽골에 갈 거란 계획”이라는 시집인데, 계획이란 말은 아직 실천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시 역시 경험담이라기보다는 시인의 상상력을 동원한 의욕으로 볼 수 있다. 환생이나 이무기 그리고 샤먼의 주술이 다소 환상적(fantastic)인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시 자체가 처음부터 현실을 반영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 전달 내용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듯 나뭇가지를 나무의 뿌리에 비유한 것 역시 신선하다. 이 정도면 일상에 찌든 사람 중 누구나 한번 꿈꿀 수 있는 사연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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