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혀에 땀이 나도록 쓰고 또
시와 함께하는 세상-혀에 땀이 나도록 쓰고 또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17 12:31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혀에 땀이 나도록 쓰고 또

흰 것에 대하여 울지 않고 말하기
그녀는 제목만 써 놓고

시시해, 시 같은 건,
쓰지 않는다 소설을 쓴다 우리
흰 것에 대하여

화구에서 막 꺼내
부서지기 직전
뜨거운

모든 흰 것에 대하여

쓰지 않을 때
시간이 멈춘다
계절이 사라진다
잇달아 얼어붙은 눈만 내린다

흰 손수건 위에 흰 발자국
흰 발자국 뒤에 흰 발자국

처음처럼 모든 끝처럼

흰 것은 끝까지 흴 것
죽어도 흴 것
검어도 흴 것

흰 것에 대하여
혀에 땀이 나도록 쓰고 또

쓸 것

(박영기의 ‘흰 것’)

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단순히 색상을 말한다면 백색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경우에 다라서는 아무 색깔이 없는 상태 즉, 무색을 상징할 수도 있다. 갑자기 황당한 일을 당했을 때 머리가 하얗게 된다는 표현을 하는데 이를 때는 재시동(reset)의 상태가 된다는 것이고 색으로 비유하면 무색의 상태가 된다는 뜻이고 무색은 곧 새로운 출발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흰 것에 대해서 운다고 한다. 왜? 앞서 언급했듯 희다는 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그것은 모든 일은 남처럼 따라 하기는 쉬워도 개성 있는 시작은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녀는(시인) 우선 제목만 써두고 어떤 식으로 전개해 나갈까 고민한다는 것이다. “시시해, 시 같은 건,/ 쓰지 않는다 소설을 쓴다.” 표현 과정에서 도치법을 쓴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정말 시가 쉽고 소설 쓰기가 어렵다는 뜻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시 쓰기가 더 어렵다는 속내로 시에 대해서는 끝내 “희다”라는 논리다. 흰 이유는 예컨대 ‘무엇에 대해서 쓸 것인가,’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걱정이다. 마치 화가가 도구를 꺼내 놓은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와 같은 논리다.

아무튼 뭔가에 대해서 시를 쓰긴 써야겠는데,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머리가 하얗게 되는 것이 시간이 멈춰진 것과 같다. 그래서 “잇달아 얼어붙은 눈만 내린다”라고 말하면서 온통 하얗게 되는 것이 눈이 내려온 세상을 다 덮은 것 같다. 그럴 때는 뭘 써도 흰 수건 위에 흰 발자국이 있는 것처럼 어디서 어디까지 쓰고 있는지 혹은, 의미 자체를 확인할 수도 없다. 그래서 “죽어도 흴 것 / 검어도 흴 것”처럼 항상 처음 쓰는 것 같고 얼마쯤 썼다 싶어도 역시 처음 쓰는 것 같다는 논리다. 하지만, 내가 시인인 이상 “혀에 땀이 나도록 쓰고 또 / 쓸 것”처럼 시인의 위치에서는 어떤 식으로든 시를 열심히 써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 시인이 주장하는 명제라는 뜻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번 시를 읽는 과정에서 독자의 입장에서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쓴다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정직 그 시를 쓰는 시인은 뼈를 깎는 진통 끝에 완성된다. 그러니 시를 아무렇게나 읽어서는 안 된다는 속내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