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모서리는 모서리에 상처를 입고
시와 함께하는 세상-모서리는 모서리에 상처를 입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1.24 12:51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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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모서리는 모서리에 상처를 입고

태양이 문을 닫는가

어두워서야 드러나는 모서리의 참회가
눅눅하고 깊어질 때
소름처럼,
번져가는 얼룩처럼 도시는 소요하다

두고 온 이름을 애써 외면하던 저녁의 얼굴에
휘황한 네온사인으로 각인되는 문장들의 향연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혀는 희극인가 비극인가

나는 너무 오래 살았고
너는 너무 일찍 죽었고
모서리는 모서리에 상처를 입고

어느 혀에 베였기에
후미진 골목에는 캄캄한 심장의 파편이 쌓였나
하수구를 따라 흐르다
강이거나 바다의 기슭을 향하는
숭고한 저, 녹슨 피

(이서린의 ‘녹슨 피’)

시구의 표현 방법이 매우 상징적이면서 내면적인 상처를 묵히려는 밀도 높은 작품이다. 이서린 시인은 우리 지역 사람으로 삶의 과정에서 굴곡이 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시 마디마디 속에는 살아가는 과정에서의 애환이 짙은 작품이 많다.

모서리 같은 생의 걸림돌은 밝은 대낮에는 잘 보이기 때문에 누구나 조심하는 반면 어둠이 내릴 무렵이면 뜻하지 않게 돌출된 부분 때문에 봉변당하기 마련이다. 물론 그 모서리라는 것이 현상적인 모서리가 될 수도 있지만, 인간 생활에서 비롯되는 과정에서 오는 갈등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래서 도시 곳곳에서 사람 사이에서 소요하는 상황이 종종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밤거리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유흥가에서는 더더욱 빈번히 목격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시인의 생각이다. 그러니 홍등으로 화려한 거리가 희극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Charles Chaplin)이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했는데, 이서린의 시각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적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적이다’라는 견해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시는 후반으로 흘러갈수록 좀 더 비극적으로 흐른다. 이렇게 불합리한 사회에서 삶에 회의를 느끼고 죽고자 하는 나와 정작 오랫동안 살아야 할 누군가는 너무 일찍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 시인에게는 상처로 남아 있다. 이것은 물론 시인 자신을 자학적이고 비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다소 겸손의 입장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시인의 내면을 읽기에 충분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상처를 입고 그 상처의 흔적들을 /후미진 골목에는 캄캄한 심장의 파편이 쌓였나/이라고 표현하면서 /강이거나 바다의 기슭을 향하는 / 숭고한 저, 녹슨 피/라고 마무리하는 것은 다소 역설적인 면이기도 하다.

시인은 어떤 여유로 이렇게 심한 상처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비정한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어려움에 부닥친 아픔을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사는 혀는 희극인가 비극인가/라는 시어를 볼 때, 자신과 관련된 근거 없는 풍문으로 얻은 상처가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할 수 있다.

1995년 경남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저녁의 내부’,‘그때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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