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세상에 없는 점성술을 갖게 됐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세상에 없는 점성술을 갖게 됐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2.14 13:2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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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세상에 없는 점성술을 갖게 됐다
 
새 직업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을 찾아 이름을 붙여주는 일이 있었다 대개는 별 볼 일 없다고 나무랐지만 지구의 시간이 닫히면 우주로 가는 길이 열렸다
 
우주복 한 벌은 스물한 겹으로 이루어졌대, 우리는 서로의 겹이 되어 압력을 이겨냈고
 
투명하게 빛나는 별과 별을 이어 뿔이 뚜렷해 흰사슴자리로 작명하고 섬에서 가장 높은 산에 놓아 주었다.
 
중산간 달리며 흐느끼는 걸 옮겨 음악을 지었다 흰 사슴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오름처럼 흩어졌다
오늘의 별자리는 지도에 넣지 않고 간직하기로 했다 세상에 없는 점성술을 갖게 됐다
 
(황형철의 ‘흰사슴자리’)
 
이 시를 읽는 순간 독자들은 무엇을 연상했는진 모르겠지만 필자는 제주도의 전설이나 민화, 특히 백록담을 연상하게 되었다. 예로부터 제주도 한라산에는 흰 사슴이 서식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 한라산 정상에 있는 백록담(白鹿潭)의 이름과 무관하지 않다. 동서를 막론하고 흰 사슴은 범상치 않은 존재로 여겼다. 동양에서는 십장생(十長生) 중 하나로 여겨왔고 기독교 문화권에서도 악마를 뜻하는 뱀을 제압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했으니 크리스마스 송 중에 ‘루돌프 사슴코’ 이야기도 의미 없이 존재했던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각설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별자리 중에 ‘흰사슴자리’가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왜 시인은 ‘흰사슴자리’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짐작해보면, ‘중산간 달리며 흐느끼는 걸 옮겨 음악을 지었다 흰 사슴을 보았다는 목격담이 오름처럼 흩어졌다’는 말처럼 한라산과 같은 고산지대에서 살고 있는 흰 사슴을 메타포로 삼았기 때문이리라. 중산간이란, 해발 100 미트에서 300 미트 사이의 고산지대를 말하기 때문에 문제의 사슴이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높은 지역에 살고 있음을 실제 별자리는 아니지만, 별자리처럼 형상화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첫 번째 연에서 천문학자들이 붙인 이름은 아니지만, 굳이 지구의 시간이 닫히고 우주를 상상할 수 있는 밤에만 나타난다는 것은 흰 사슴을 쉽게 볼 수 없음에 대한 메타포의 설정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흰 사슴은 사람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나 시간대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지한 채 살아가는 신성한 존재로 형상화하게 된 것이다. 물론 “투명하게 빛나는 별과 별을 이어 뿔이 뚜렷해 ‘흰사슴자리’로 작명하고 섬에서 가장 높은 산에 놓아 주었다.”는 이야기는 섬에서 가장 높은 곳(한라산)을 하늘에 비유한 말로, 산정인 백록담 일대에서 서식하는 사슴을 기교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그런데 ‘투명하게 빛나는 별과 별을 이어 뿔이 뚜렷해’라는 비유어가 무척 새롭게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별은 하늘에 떠 있는 별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시어로서는 다소 식상한 말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흰 사슴의 뾰족한 뿔의 끝부분이 날카롭게 서 있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시적인 강도가 높다고 할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실제 ‘흰사슴자리’라는 성좌는 없으므로 실제 점성술로 활용할 수도 없음도 당연하다. 결국 성좌는 한라산이라는 하늘처럼 높은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현실적인 이야기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학이란 이렇게 편리할 때가 빈번하다. 비록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형상화하여 환상적인 세계로 인도함으로써 흥미를 북돋우게 할 수도 있으니, 이런 특징은 서사와는 달리 문학만 가지는 특권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특히 이번 시에서는 한라산이라는 공간적 배경에 대한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한라산을 연상하게 하는 시적 기법에도 많은 흥미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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