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열차는 출발한다
시와 함께하는 세상-열차는 출발한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4.03.27 11:43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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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열차는 출발한다

내 영토가 사라져 간다
내 편이 떠나간다
뭉텅이뭉텅이 잘려나간다

더욱 홀가분해지기 위해
남아있는 것
가여운 것들을 버려야 산다

열차는 출발한다
몰약나무 잎새 향기로움 저편
미르 우주정거장 그 너머로

달항아리
눈물,
조용한 새벽

열차는 출발한다
기적을 울리면서
사람 마음빛 고운 날

달마의 시간
애도의 애도를 위한 시간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이수영의 ‘애도의 시간’)

불교에서 말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 상황이고 이 상황에 의해 탄생과 죽음이 반복된다. 중년의 시인은 이렇게 흐르는 시간을 생의 바로 옆에서 실감하고 있다. 시제가 ‘애도의 시간’이다. 이건 누군가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이야기다.

첫 번째 연에서 “내 영토가 사라져 간다 / 내 편이 떠나간다 / 내 영토가 내 편이 뭉텅뭉텅 사라지고 잘려 나갔다.”고 한다. 세상에서 나의 가장 큰 우군은 배우자다. 배우자는 언제나 내 편이고 내 영토라고 가정한다면 시인의 부군과 사별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나의 우군이 뭉텅 잘려 나간 상황이란, 허전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몰약나무 잎새 향기로움 저편 / 미르 우주정거장 그 너머로”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이것을 종교와 과학의 혼합이라고 해야 할까? 몰약은 고대로부터 방향 및 방부제로 쓰이는데, 사자의 시신에 발라줌으로써 소독과 향수 역할을 동시에 하며, 미르 우주 정거장은 하늘나라 즉, 저승을 상징하기 때문에 둘 다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된다. 이렇듯 배우자와의 사별을 표현하는 이면에 이별에 대한 강한 슬픔이 묻어난다.

머지않아 나의 운명도 배우자가 간 길을 따라갈 것이다. 그때 갑자기 다가온 운명에 당황하지 않으려면 주변의 정리와 그 정리할 것 중에서 버려야 하는 것은 버릴 줄 아는 지혜도 필요할 것이다. “열차는 출발한다”는 의미는 당연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시간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꾸만 흘러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영혼이 멀리 하늘로 날아오를 때쯤 남아있는 또 다른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며 슬픔에 잠겨 있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시간은 슬퍼하고 있는 동안에도 기다려 주지 않고 여전히 흘러갈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 말하는 ‘달마(達摩)의 시간’은 불교에서 말하는 자연계의 법칙과 인간의 질서를 이르는 말이다. 생로병사는 인간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달마의 원리라고 볼 때, 달마란, 삶과 죽음의 원리를 이르는 다른 말이기도 하다. 시인은 그 시간을 “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이라고 한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탄생의 시간이라면, 겨울은 반대로 죽음의 시간이다. 죽음 뒤에 탄생이 다가오듯, 어쩌면 시인은 ‘애도의 시간’ 다음에 다시 ‘만날 시간’을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비교적 짧은 시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 같다. 죽음 앞에서 겸허해지는 시인의 자세에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게 해 주는 시다. 거꾸로 보면 우리가 생을 누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의 열차는 출발시키고 있는 달마 앞에 무력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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